(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고구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다.
그밖에 고구려에서는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주(周)· 마(馬)·
예(芮)· 손(孫)· 창(倉)· 동(董)·
연(淵)· 명림(明臨)· 을지 (乙支) 등 10여종 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한국 역사서 [삼국사기]에서 -
▣ 의흥 예씨는 본래의 본관이 부계(缶溪)였는데 중간에 부계지역이 고려 초에 의흥군으로 병합되었다.
그래서 관(貫)을 의흥으로 사용하는 파가 있고, 부계를 관(貫)으로 삼아 사용하는 파가 있다. - 중앙일보사 -
(현재의 본관은 의흥(義興) 단본이다.)
▣ 유래
예씨의 뿌리는 중국 고대 8대 성씨 중 하나인 희성씨(姬姓氏)에서 나왔다.
(芮 姓 出 自 姬 姓)
중시조 : 예낙전(芮樂全)
시조 예낙전(芮樂全)은 고려 인종 때에 문화 찬성사로 부계(의흥)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부계라고 했다.
옛 문헌에는 본관이 의흥으로 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의흥의 옛 지명인 부계로 되어있다.
예씨의 선대는 중국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문자왕13년(504)에 사신으로 북위에 갔던 예실불에 관한 기록이 있고
경남 울주군 천전리 신라 화랑 석각에는 예씨성의 금석명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 중국의 주·한·당·송등 역대의 사서에도 예씨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산서성에는 「예성」까지 있어 그 뿌리가 깊은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문헌이 없어 예낙전이상의 선대계보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예씨는 3세에 이르러 검교중랑장(예중태)파와 봉익대부전상판서 (예장준)파로 크게 나뉘어졌다.
7세손 예승석은 조선초기 (1406∼1476)예문의대표적 인물.
세종29년 문과에 급제, 평안·강원·전라도관찰사, 한성부 우윤, 대사간등을 지낸 명신이요 청백리였다.
그의 아들 예충련 또한 성종6년 문과에 올라 홍주진 병마절제사 경주부윤 성균관 대사성등을 지냈다.
예씨는 시조 예낙전이 부계에 뿌리 내린 이후 7세손 예승석대에 와서 충남 당진의 면천으로 옮겨 그 맥을 이어왔다.
그 후 10세손 예극양이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전(한밭) 동으로 못자리를 옮긴다.
예극양은 임진왜란당시 어모장군 (정3품) 이었다.
선조가 의주로 피신할 때 수행한 임란공신이었으나 7년전쟁이 끝나자 일체의 벼슬을 버리고
삼국시대의 이서국 옛터인 「한밭」 에 정착해「한운야학」을 벗 삼아 살았다.
이 같은 이유로 「의흥예문」은 본관을「한밭」이라 부르기도 한다.「한밭」을 중심으로 한 청도군은 예씨의 아성이다.
임란공신 예극양이 한밭에 뿌리 내린 이후 그 후손들은 문한과 청식, 덕업의 전통을 가꾸었다.
전설적인 효자 예조학의 「경암유고」, 예대기의 「균곡유고」, 예대주의 「의재집」, 국치를 당하자 중국에 망명,
절의를 지킨 영남의 석학 예대희의 「이산집」등이 조선후기 「의흥예문」이 남긴 학문적 자취다.
대체로 영남의 사림들이 그러했듯이 조선조의 예씨들은 생원 및 진사시에 등과하는데 만족 했을뿐 벼슬은 사양했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 대표적 인물이 조선말엽의 예대열이다.
그는 진사시에 14번 도전한끝에 진사에 올랐으나 관직만큼은 끝내 거절, 가문의 전통을 지켰다한다.
예부터 영남의 사림들은 예씨를 비롯, 경북지방에 분포되어 사는 희성 도씨·장씨등 3문중을
구도(대구의도씨) 청예 (청도의예씨) 밀장 (밀양의 장씨)」이라 부르며 존경해왔다.
이들 3문중은 희성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 지방 대성 못지않게 문한의 가통을 지키며 영남사림의 전형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이 고집스럽게 가문의 전통을 고수한 탓일까, 의흥예씨 문중에서는 개화기 이후에도 두각을 나타낸 인재가 드물다.
이른바 『「반촌」의 통폐로 인해 새로운 시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의흥예씨 화수회측의 해석이다.
-인터넷 자료-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예성질(芮成質, 1809 己巳生) : 문과(文科) 고종20년(1883) 식년시 을과(乙科)
예대열(芮大烈, 1768 戊子生) : 사마시(司馬試) 헌종1년(1835) 증광시 일등(一等) 장원급
예주명(芮周鳴, 1786 丙午生) : 사마시(司馬試) 헌종15년(1849) 식년시 삼등(三等)
예재문(芮在文, 1739 己未生) : 사마시(司馬試) 영조44년(1768) 식년시 삼등(三等)
* 모두 4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명, 사마시 3명)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
의흥(義興)은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려 초에 의흥군(義興郡)이 되어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게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부계현(缶溪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의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의흥군이 폐지되었고
의흥지역이 군위군에 편입되면서 의흥면이 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의흥예씨는
1960년도 국세 조사에서는 인구 5,956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01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2,574가구로 274성 중 제100위였다.
주요 인물로는 세조 때 이조참의 대사간을 지내고
성종 때 공조 참판 ·전라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을 거쳐 중추부 동지사에 이른 승석(承錫)이 있다.
그의 아들 충년(忠年)은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종 때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경주 부윤에 이르렀다.
승석의 현손인 어모장군(禦侮將軍) 극양(克讓)이 경북 청도군 이서면(伊西面)에 정착하여 산 이후로 그곳에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 자료-
자연 환경중 산세로 인한 지리적 여건은 칠엽리와 같다.
그러나 칠엽리보다 아래쪽인 남쪽이고 지대 또한 낮으며 청도천변까지 평지가 이어져 농경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고 있다.
이 마을도 삼면(동, 서, 북)이 산으로 가리어 있으며 마을 앞쪽에는 청도천이 흐르고 있다.
이 동리는 군내 굴지의 집성촌이다.
연산조 시대인 1500년초에 예씨의 입향조인 의흥인 예극양 공이 예문(芮門)을 열었다.
당시에 이 곳에도 주민이 있은 것으로 추측되나 어떤 씨족인지는 문헌이 없으니 다만 기록에 따를 뿐이다.
상,하대전 즉 1, 2리는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대전,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대전으로 분리되어 있다.대전(大田-한밭)
예공이 입촌하여 마을의 기초를 새롭게 다지면서 부근일대를 개척하여 농토를 넓혀 나가자 넓은 밭이 많아서 한밭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대전(大田)이라는 것이다.
※
참고 사항
우리나라(한반도)는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인구의 90%이상이 성이 없었고 자신의 조상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조선 말에 경제력이 발전하면서 먹고살만하니까 앞다투어 가짜족보 등을 만들어 제꼈지요.
(그래서 김씨/이씨/박씨가 그렇게 많은 겁니다.
무슨 성으로 할까하다가 다들 그냥 김씨나 이씨나 박씨로 정했죠. 유명한 사람이 많으니까)
조선시대가 그러한데 훨씬 옜날인 고구려 때는 성이라는 것은 왕이나 고위 귀족정도가 아니면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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