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芮姓 歷史 起源 ☜
주나라 문왕시대 당시 ‘량부’라고 불렸던 인물이 있었는데,
주 왕실의 고관대작으로 ‘경사’라는 직위를 가졌다.
주나라 문왕은 출사 준비중 갑자기 서거 한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무왕은 은나라(상나라)를 정벌하여 주 왕조를 건립한다.
‘량부’는 주 무왕으로부터 ‘예읍’을 하사받고 군주에 봉해진다.
‘예읍’의 소재지는 그 동안 여러 다른 의견이 있었다.
지금의 산서성 예성현이라는 의견이 있고,
지금의 섬서성 조읍현 남쪽 지방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제후국이라고 할 수 없었고,
주 성왕시대에 왔어야 정식으로 제후국이 되었다.
‘량부’는 [예백]으로 불리었다.
그리하여 주 왕실의 ‘사도’라는 직무를 담당하였고,
자손들은 주 왕실의 ‘경사’로 세습되었다.
춘추 전국시대에 ‘예국’은 ‘진국’에 패하고 소멸 된다.
망국 후 ‘예국’ 군주와 종실은 국호를 성씨로 삼았다.
<출처 - 위키 백과 사전>
예씨는 주(周)나라 예백(芮伯)의 후손이다.
예국(芮国) : 춘추시대 서 주나라의 일개 제후국
서(西) 주나라 초기(기원전11세기)에 개국하여 기원전 640년 혹은 658년 멸망함.
기원전 11세기에 주무왕은 섬서성 다리현 조읍진 남쪽에 위치한 예읍을 경사 예량부에 봉했으며,
산서성 예성현에 있는 예성에는 고대 위나라의 진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섬서성 웨이난시 징성현에 있는 묘지가 예공의 고향인 예공 집안의 공동묘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섬서성 한성시 잠촌진 량다이촌은 예국 묘지이다.
주(周) 성왕(成王) 재위 기간에 공식적으로 예(Rui) 왕국이 수립되었고,
왕은 한때 주(周) 왕가의 사도를 역임한 예백(Rui Bo)라고 합니다.
춘추시대에 진나라 목공이 예국을 멸망시켰다.
사마천의 "사기 진본기"에는 진나라 목공 20년(기원전 640년)에 예국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路史"는 진목공이 진목공 2년(기원전 658년)에 예국을 멸망시켰다는 진술을 기록하고 있다.
진목공 원년(전 659년)에 진(秦)목공은 정식으로 계승되었고,
그 후 백리수와 첩숙을 국사를 논하는 대신으로 임명하여 힘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려
진(晋)나라를 물리치고 진(晋)혜공을 사로잡아 양국, 예국, 활국등을 멸망시켰다.
주 무왕, 주나라의 제1대 천자(天子) : 기원전 1087년 ~ 기원전 1043년 추정
주원(周原) 사람으로 본명은 희발(姬發)이다.
서주(西周)의 개국군주(開國君主)이자 군사가, 정치가이다.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과 태사(太姒, 주문왕의 정비)의 차남으로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기원전 11세기에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주 왕조를 건립했다.
주 성왕, 주나라의 제2대 천자(天子) : 기원전 1054년 ~ 기원전 1020년 추정
주 무왕의 아들로, 성은 희(姬). 휘는 송(誦)이다.
진(秦)목공, 진국(秦国) 제 9대 国王 : 기원전 659年 ~ 기원전 621年
진(晋)혜공, 진국(晋国) 제 20대 国王 : 기원전 650年 ~ 기원전 637年
路史 : 송나라의 나필이 총 47권으로 썼다. 이 책은 잡사다.
읽기 어렵고 어려운 것으로 해석되며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 인터넷 자료-
< 예우(芮虞) 분쟁(紛爭)>
제후국인 우국(虞國)과 예국(芮國)은 서로 인접한 나라인데 그 경계선을 에워싸고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몇해도 지나도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주나라의 서백(주나라 문왕)에게 가서 재판을 받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양국의 군주는 주나라의 영내(領內)로 들어와 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밭을 가는 농부는 밭두둑을 하나같이 서로 양보하고, 길가는 사람은 서로 길을 양보하고,
짐을 진 노인은 하나도 없고,있다면 모두 젊은이들 뿐이었는데
그 행동은 자연스럽고, 몸에 베인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노인을 공경하며, 윗사람을 섬기는 자세가 몸에 베어 있다는 점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온화한 말로 인사를 주고 받으며 활기가 넘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
이를 본 두 사람은 깊이 반성하였다.
"우리들의 분쟁은 이 나라에서 웃음거리밖에 안 되겠군."
두 사람은 서백을 만나지도 않고 발길을 돌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그 후 서로 토지를 양보하며 두 번 다시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
- 중국 역사서 [십팔사략]에서 발췌-
북(北) 예국, 남(南) 예국, 동(東) 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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